호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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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 왕조는 1400년 호꾸이리가 건국한 베트남의 왕조이다. 쩐 왕조의 혼란 속에서 권력을 장악한 호꾸이리는 1400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우로 변경하고 호 왕조를 개창했다. 호꾸이리는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모색했으나, 명나라의 침공으로 1407년 멸망했다. 호 왕조는 2대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으며, 호꾸이리와 호한창이 황제로 재위했다.
1225년에 건국된 쩐 왕조(陳朝)는 13세기까지 쩐흥다오를 비롯한 유능한 황제와 일족들이 나라를 잘 이끌었다. 그러나 14세기 들어 무능한 황제가 나타나면서 국내에서는 황족과 대신들의 반란과 부패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 세력을 확장한 인물이 호꾸이리(胡季犛)였다. 그는 과거 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과 손을 잡고 쩐 왕조 내부에서 세력을 넓혀 예종의 외척이 되어 신임을 받았다. 예종이 참파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황제의 위신이 실추되자, 1388년 진현(陳晛)을 살해하고 자신의 사위인 순종을 옹립하여 재상으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2. 역사
1394년 상황(上皇)으로서 쩐 왕조를 지탱하던 예종이 사망하자, 호꾸이리는 유력한 황족과 중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1398년에는 순종을 폐위시키고 살해한 후, 어린 소제(少帝)를 옹립하였다. 1400년 소제마저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우(大虞)로 고치고 성을 여(레)씨(黎氏)에서 호씨(胡氏)로 바꾸었다. 이로써 쩐 왕조는 멸망하고 호 왕조가 건국되었다.
호꾸이리는 잦은 숙청과 찬탈로 주변의 원한과 반감을 샀다. 그는 아들 호한창(胡漢蒼)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상황이 되었으나, 실권은 여전히 그가 장악하고 있었다. 호꾸이리는 쩐 왕조처럼 왕족들을 등용하면서도, 귀족 제도를 폐지하고 과거 제도를 개혁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군사력 강화, 문예 장려, 호적 제도 도입 등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중국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명나라 영락제는 쩐 왕조의 복권과 황족 즉위를 요구하였다. 호꾸이리는 이를 거절하여 영락제와 대립하였고, 이는 명나라의 베트남 침공 구실이 되었다. 1407년 명나라군의 침공으로 수도 타인호아가 함락되었고, 호꾸이리와 호한창 부자는 남경(南京)으로 호송되어 처형되었다.[15] 결국 호 왕조는 2대 7년 만에 멸망하였다.
2. 1. 건국
1225년에 건국된 쩐 왕조(陳朝)는 13세기까지 쩐흥다오를 비롯한 유능한 황제와 일족들이 나타나 나라를 잘 이끌었다. 그러나 14세기 들어 무능한 황제가 나타나면서 국내에서는 황족과 대신들의 반란과 부패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 세력을 확장한 인물이 호꾸이리(胡季犛)였다. 그는 과거 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과 손을 잡고 쩐 왕조 내부에서 교묘하게 세력을 넓혀, 제9대 황제 예종의 외척이 되어 신임을 받았다. 제10대 황제 예종이 참파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황제의 위신이 실추되자, 1388년 제11대 황제 진현(陳晛)을 살해하고 자신의 사위인 순종을 옹립하여 재상의 자리에 올라 실권을 장악하였다.
1394년 상황(上皇)으로서 쩐 왕조를 지탱하고 있던 예종이 사망하자, 호꾸이리는 즉시 유력한 황족과 중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1398년에는 성인이 된 순종을 폐위시키고 살해한 후, 나이가 어린 소제(少帝)를 옹립하였다. 1400년 결국 소제마저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국호를 대우(大虞)라고 고치고 성을 여(레)씨(黎氏)에서 호씨(胡氏)로 바꾸었다. 이로써 쩐 왕조는 멸망하고 호 왕조가 건국되었다.
2. 2. 개혁 정치
호꾸이리는 토지 개혁, 외국 무역을 위한 항구 개방, 사법 개혁, 의료 개혁을 추진했다.[17] 또한, 유교 경전과 함께 수학, 농업을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 제도를 개방하였다.[17] 1399년 또는 1400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종이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16]
2. 3. 명나라와의 관계
명나라 영락제는 쩐 왕조의 복권과 황족 즉위를 요구했으나, 호꾸이리는 이를 거절하여 영락제와 대립했다. 이는 명나라가 베트남을 침공하는 구실이 되었다.[9]
1403년 5월, 호꾸이리는 명나라 조정에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호꾸이리의 쿠데타를 알지 못했던 영락제는 이를 승인했다.[9]
1404년 10월, 쩐티엔빈(陳添平)이 난징에 도착하여 자신이 쩐 왕조의 왕자라고 주장하며 영락제에게 왕위 계승을 요구했다.[10] 1405년 초 베트남 사신을 통해 쩐티엔빈의 이야기를 확인한 후, 영락제는 호꾸이리를 질책하고 쩐 왕조 복위를 요구하는 칙령을 내렸다.[10][12]
호꾸이리는 쩐티엔빈의 주장에 의구심을 가졌지만,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10][12] 1406년 4월 4일, 쩐티엔빈 일행이 랑선성을 넘어 국경을 넘는 도중, 호꾸이리 군대가 매복하여 쩐티엔빈과 명나라 사신을 모두 살해했다.[10][13] 호꾸이리는 명나라 남쪽 국경을 침략하기 시작했다.[14]
1407년 명나라군 침공으로 수도 타인호아가 함락되었고, 호꾸이리와 호한창 부자는 난징으로 호송되어 처형되었다.
2. 4. 멸망
명나라 영락제는 쩐 왕조의 복권과 황족의 즉위를 요구하였으나, 호꾸이리가 이를 거절하면서 영락제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는 명나라에 베트남 침공의 구실을 제공하였다.[9]
1404년 10월, 쩐티엔빈(陳添平)이 명나라 난징(南京) 조정에 도착하여 자신이 쩐 왕조의 왕자라고 주장하며 영락제에게 왕위 계승을 요구했다.[10] 호꾸이리는 쩐티엔빈의 주장에 의구심을 가졌지만,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10][12] 쩐티엔빈은 명나라 사신을 동반한 군사 호송대에 의해 호송되어 돌아왔으나, 1406년 4월 4일, 국경을 넘던 중 호꾸이리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왕자와 명나라 사신 모두 살해당했다.[10][13] 또한 호꾸이리는 명나라 남쪽 국경을 침략하기 시작했다.[14]
1406년 5월 11일, 영락제는 두 개의 군대를 파병하여 침공을 개시했다.[10] 1407년 명나라 군의 침공으로 수도 타인호아가 함락되었다. 호꾸이리와 호한창 부자는 명나라군에 의해 난징으로 호송되어 영락제에 의해 처형되었다.[15] 이로써 호 왕조는 2대 7년 만에 멸망하였다.
3. 역대 군주
1401년 ~ 1407년